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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은 충북 충주시 앙성면 영죽리다.

동네앞에는 남한강물이 흐르고 있다.

내가 어린 시절 충주댐이 건설되기전 장마철에는 수박, 참외가 흙탕물에 떠내려갔고, 초가지붕도 떠내려가면서 초가지붕위에 “사람 살려요 !”라고 애원 하면서 사람도 같이 떠내려갔다.

초가지붕에는 뱀들도 있었다.

장마철에는 동네앞까지 강물이 들어왔다.

내가 고향을 떠난후 1971년 여름밤 장마에 동네 집들이 모두 떠내려 갔다.

그리고 1991년 내가 퇴사후 경주에서 고시 준비할때였다.

여름밤 저녁식사후 집 근처 독서실에서 공부를 하다가 창밖을 내려다 보니 장대같이 쏟아지는 빗속에 사람들이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등에 지고 분주하게 뛰어 다녔다.

사람들에게 문의하니 보문단지 붕괴 우려로 보문단지위 불국사위쪽으로 피난 가야 한다고 했다.

보문단지가 붕괴 되면 경주시내가 침수 되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오니 아내는 공부에 지장을 줄까봐 연락하지않고 울면서 혼자 이불 보따리를 챙기고 있었다.

두 딸과 아내 집안식구는 동행정복지센터에서 제공한 버스를 타고 불국사위 산속에서 밤새도록 모기와 전쟁하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다행히 보문단지는 무너지지 않았고 안강저수지가 붕괴 되었다.

금년 장마철에는 몇 십년만에 집중 폭우로 전국이 피해가 심하다.

특히 내가 근무했던 철원 동송리, 동막리, 내 고향인 충북에 관심이 많았다.

탄천이 범람하면 용인시의 쓰레기가 떠내려와 성남지역 탄천변의 나뭇가지에 걸렸다.

휴가철에 휴가도 못가고 남들은 탄천변 물놀이장에서 시원한 과일을 먹으며 물놀이를 즐기고 있는데 그 옆에서 성남시청 기간제 계약직들은 폭염속에 탄천물속 나뭇가지에 걸린 쓰레기를 건져 내려고 긴장화를 입고 허리까지 차 오르는 탄천물속으로 들어가 쓰레기를 건져 내야 했다.

폭염속에 긴장화를 입은 자체도 호흡 곤란을 일으켰다.

생태학습지로 고여있는 진흙탕물속에 쓰레기를 건져 내려면 지독한 쓰레기 썩는 냄새와 옷이 땀 범벅과 진흙 투성이로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어 퇴근할 때 시내버스, 지하철 타기가 두러웠다.

앞으로도 몇 번 태풍이 다가올 것을 예상하여 쓰레기 치우는 것을 임시방편으로 치우고  장마철로 무성하게 자란 풀을 깎아 갈퀴로 긁어 모아 버리느냐고 힘든 갈퀴질로 허리가 아프고 손바닥에  물집이 생기고 손가락에 굳은살이 박힐 정도다.

 

쓰레기는 장마철이 끝난후 치워야할 것 같다.

모든 작업을 기계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인력으로 하자니 아우지탄광의 막장에서 일하는 광부나 북한의 강제동원되어 노동자들의 작업환경을 연상케 했다.

탄천물속에 커다란 나무들 때문에 쓰레기가 많이 걸리는데 탄천물이 흐르는 중앙의 커다란 나무는 그늘도 안되고 아무 쓸모가 없어 커다란 나무는 모두 베어 내면 쓰레기들이 나무에 걸리지 않을 것 같은 아쉬움이 있었다.

희망찬 휴가를 폭염과 장마의 휴유증으로 땀을 뻘뻘 흘리며쓰레기를 던져내고 풀을 깎아 긁어모아 버려야 할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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